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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과 아내-헤겔(1)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47화)
영암일보입력 : 2025. 02. 21(금)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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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철학박사
쇼펜하우어는 헤겔에 대해 이렇게 비웃었다. “무식한 사기꾼인 헤겔은 뻔뻔스럽고도 어리석은 소리들을 잔뜩 늘어놓았는데, 이것을 그의 상업적인 추종자들은 불멸의 진리인 양 나팔을 불어댔으며, 바보들은 그것을 진실인 줄로 알아 환호하며 받아들였다. ....그러나 언젠가 헤겔에 대한 진실이 폭로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예언은 빗나갔다. 헤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졌고, 전 세계에 헤겔 학회가 조직되었으며, 온갖 종류의 헤겔 학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국 헤겔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증오는 개인적인 원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쇼펜하우어를 강사로 채용하는 시험의 심사위원장이었던 헤겔이 그를 떨어뜨렸다고 오해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헤겔의 부친은 독일 남부의 작은 공국 뷔르템베르크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공무원이었다. 고향에서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헤겔은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성적도 철학을 제외하고는 평균점 이하였다. 신학 교수의 딸과 연애하며 공부를 등한히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1789년)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평소에 ‘노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헤겔이었지만, 혁명에 대한 정열만은 대단했다. 그는 매년 기념일마다 혁명을 자축하며 포도주를 마셨다.

헤겔은 예나 대학에 시간강사로 초빙되어 갔다. 그러나 봉급이 워낙 적어 바이마르의 문교 장관이었던 괴테(세계적인 문호)에게 보조금을 요청해야만 했다. 헤겔은 예나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정찰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세계정신(나폴레옹을 지칭)을 보았다.” 헤겔은 나폴레옹이 자유와 민족주의를 전파하는 것으로 보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 ‘세계정신’에 의해 헤겔의 집은 약탈당했고,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봉급마저 지급이 중단되었다. 이 와중에서 헤겔의 저서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정신현상학』의 마지막 부분이 탈고되었다. 출판사의 빗발치는 독촉과 함께 전쟁터의 포성을 들으면서 서둘러 원고를 마감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몇 페이지가 충분치 못하게 씌어졌다는 말이 전해진다.

서른 일곱 살에는 하숙집 부인과의 불륜 관계로 인하여 루트비히라는 사생아를 낳고 말았다. 그녀는 딸 하나를 둔 부인이었는데, 그 무렵 남편이 멀리 떠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불륜 관계는 곧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것은 교수 신분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대학에 머물 수가 없었다.

직장을 잃고 아버지의 유산마저 바닥을 내버린 헤겔은 심한 가난 상태에 빠졌다. 책에 대한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심한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작은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가 곧 그만두고, 친구의 소개로 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무렵, 헤겔은 명문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았다. 첫 딸은 난 지 수 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두 아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장남은 역사학자가 되었고, 차남은 개신교의 종교국장이 되었다. 결혼 전에 낳았던 사생아 루트비히는 고아원에서 헤겔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았는데, 이복 동생들과 자주 싸우다가 얼마 후 집을 나가버렸다. 그는 나중에 네덜란드의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결국 인도네시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헤겔은 결혼 생활을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는데, 한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직장과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다는 것만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보네. 그 밖의 모든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닐세.” 철학자는 독신이어야 한다는 통념이 헤겔에게는 타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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