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변의 명강의-헤겔(2)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48화)
영암일보입력 : 2025. 03. 07(금) 09:37

▲강성률 철학박사
헤겔(1770년-1831년)은 줄곧 대학교수가 되고 싶어 했다. 마침내 마흔 여섯 살 때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의 정교수가 되었다. 첫 해의 강의에는 수강생이 네 명밖에 안된 일도 있었으나 다음 해 수강생의 수는 70명이 넘었고, 나중에는 헤겔을 숭배한 귀족도 생겨나고 하여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다.
그 후, 헤겔은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런데 그에게로 학생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놀랄만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강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고, 헤겔 자신 뛰어난 달변가도 못되었기 때문이다. 기운 없이 몸을 움츠리고 앉아 두꺼운 책을 찾는 동안에도 헛기침과 잔기침은 멈춰지지 않아 강의의 흐름이 계속 방해되었다. 거기에 억센 사투리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어 학생들 외에 육군 소령, 대령, 추밀고문관까지 찾아들었다. 마침내 헤겔은 ‘프러시아의 국가 철학자’로 공인되다시피 하여 독일 철학의 태두로 군림하였다. 1829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총장에 취임하여 약 1년 간 재임하기도 했다.
헤겔은 열아홉 살 때(1789년),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였다. 헤겔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정신이 있으며, 그 절대정신은 개인을 도구로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인물이 혹시 나폴레옹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헤겔은 나폴레옹이 예나(독일 중부의 소도시)에 입성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는, “나는 말을 탄 절대정신(세계정신)을 보았다.”라고 말하며 감격해 했었다. 그러나 (제47화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세계정신’에 의해 헤겔의 집은 약탈당했고,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봉급마저 지급이 중단되었다.
나폴레옹에 실망한 사람은 헤겔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하자,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문구가 선명히 적힌 자신의 세 번째 교향곡 악보 표지를 찢어버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군. 이제 그놈 또한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 채우는 폭군이 되겠군.”
보나파르트에 대한 베토벤의 존경심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교향곡 3번 ‘영웅’(에로이카)은 보나파르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쓰인 작품이었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가 유럽 전역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줄 인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이 보기좋게 꺾인 마당에 ‘보나파르타’란 이름 대신 ‘영웅’이란 새 제목을 적어넣었던 것이다.
헤겔은 1831년, 베를린 전역에 맹위를 떨치던 급성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숨을 거두려고 할 무렵, 그는 “나의 학생 중에서 나를 이해한 사람은 단지 한 사람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사이를 두고, “아니! 이 사나이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라고 덧붙었다. 헤겔은 그의 희망대로 지금 베를린에 있는 피히테의 묘 옆에 잠들어 있다.
헤겔 철학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론적 색채로 인하여 그 실현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헤겔 스스로도 프랑스 혁명을 환영하는가 하면 조국 프로이센(오늘날의 독일)의 군주제를 옹호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가처럼 거의 모든 현대철학(유물론, 실존주의, 비합리주의)은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반동 내지 극복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그 후, 헤겔은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런데 그에게로 학생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놀랄만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강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고, 헤겔 자신 뛰어난 달변가도 못되었기 때문이다. 기운 없이 몸을 움츠리고 앉아 두꺼운 책을 찾는 동안에도 헛기침과 잔기침은 멈춰지지 않아 강의의 흐름이 계속 방해되었다. 거기에 억센 사투리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어 학생들 외에 육군 소령, 대령, 추밀고문관까지 찾아들었다. 마침내 헤겔은 ‘프러시아의 국가 철학자’로 공인되다시피 하여 독일 철학의 태두로 군림하였다. 1829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총장에 취임하여 약 1년 간 재임하기도 했다.
헤겔은 열아홉 살 때(1789년),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였다. 헤겔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정신이 있으며, 그 절대정신은 개인을 도구로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인물이 혹시 나폴레옹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헤겔은 나폴레옹이 예나(독일 중부의 소도시)에 입성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는, “나는 말을 탄 절대정신(세계정신)을 보았다.”라고 말하며 감격해 했었다. 그러나 (제47화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세계정신’에 의해 헤겔의 집은 약탈당했고,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봉급마저 지급이 중단되었다.
나폴레옹에 실망한 사람은 헤겔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하자,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문구가 선명히 적힌 자신의 세 번째 교향곡 악보 표지를 찢어버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군. 이제 그놈 또한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 채우는 폭군이 되겠군.”
보나파르트에 대한 베토벤의 존경심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교향곡 3번 ‘영웅’(에로이카)은 보나파르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쓰인 작품이었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가 유럽 전역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줄 인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이 보기좋게 꺾인 마당에 ‘보나파르타’란 이름 대신 ‘영웅’이란 새 제목을 적어넣었던 것이다.
헤겔은 1831년, 베를린 전역에 맹위를 떨치던 급성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숨을 거두려고 할 무렵, 그는 “나의 학생 중에서 나를 이해한 사람은 단지 한 사람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사이를 두고, “아니! 이 사나이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라고 덧붙었다. 헤겔은 그의 희망대로 지금 베를린에 있는 피히테의 묘 옆에 잠들어 있다.
헤겔 철학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론적 색채로 인하여 그 실현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헤겔 스스로도 프랑스 혁명을 환영하는가 하면 조국 프로이센(오늘날의 독일)의 군주제를 옹호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가처럼 거의 모든 현대철학(유물론, 실존주의, 비합리주의)은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반동 내지 극복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