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쇼펜하우어(3)
재미있는 철학이야기(제 52화)
영암일보입력 : 2025. 05. 01(목) 13:29

▲강성률 철학박사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은 즉시 염세주의(厭世主義), 다시 말해 ‘세계와 인생에는 아무 가치가 없으며, 개선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고 방식으로 연결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데 비하여, 그 충족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욕망이든지 채워지고 나면 즉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고, 어떤 고통도 그것을 벗어났다 싶으면 곧바로 새로운 불행이 찾아든다. 그러므로 고통이야말로 삶의 본래 모습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깐 찾아오는 소극적인 것, 즉 고통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것이다.
이에 대한 예는 많다. 첫째, 우리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할 줄 모르다가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실감한다. 건강이나 맑은 공기, 사랑하는 사람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둘째, 우리네 삶은 마치 시계의 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인생은 두 박자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6일간의 고통과 제7일째의 권태라고 하는 1주일의 생활은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셋째, 고독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마지막에는 누구나 혼자일 뿐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는 다툼과 전쟁, 학살과 약육강식 등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작가들은 천국에 대한 묘사를 어색하게 하는 반면, 지옥에 대한 표현은 매우 뛰어나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적 삶에 있어서 지옥의 소재가 풍부한 반면에, 천국의 자료는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예컨대,『춘향전』의 대부분은 성춘향의 고생하는 장면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 뒤에는 즉시 막이 내려진다. 행복의 묘사는 작가들에 있어서도 그만큼 어색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외과 수술실, 감옥, 고문실, 전쟁터, 법정 등 온갖 불행이 깃든 음산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이다. 우리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억제되고 있는 넘어짐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억제되고 있는 죽음이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첫째로 지식은 탈출구가 아니다. 머리가 발달한 존재일수록 고통에 대한 감각도 더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란 가장 괴로운 사람에 속한다. 자살 역시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자살은 의지의 개체적 현상을 소멸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의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는 예술적 천재들이 추구하는 심미적 해탈인데, 이것 역시 삶의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둘째는 의지의 부정을 통한 윤리적인 해탈의 길인데,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영속적인 해탈로 이끄는 방법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열반(온갖 고통과 번뇌를 초탈하여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상태)의 경지에서 우리들 자신으로서 죽을 것,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고난에 찬 그의 삶에서 형성된 것이라 짐작된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일찍이 망가졌고, 대학교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여자도 사랑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야 했다. 나중에 유명해진 저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 출판 당시에는 누구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비로소 그를 알아주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인 1860년 9월 21일, 그는 냉수욕을 마친 뒤 식탁에 앉은 채, 영영 잠이 들고 말았다. 심장마비였다고 한다. 염세주의 철학자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음미해볼만한 대목이라 하겠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이에 대한 예는 많다. 첫째, 우리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할 줄 모르다가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실감한다. 건강이나 맑은 공기, 사랑하는 사람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둘째, 우리네 삶은 마치 시계의 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인생은 두 박자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6일간의 고통과 제7일째의 권태라고 하는 1주일의 생활은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셋째, 고독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마지막에는 누구나 혼자일 뿐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는 다툼과 전쟁, 학살과 약육강식 등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작가들은 천국에 대한 묘사를 어색하게 하는 반면, 지옥에 대한 표현은 매우 뛰어나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적 삶에 있어서 지옥의 소재가 풍부한 반면에, 천국의 자료는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예컨대,『춘향전』의 대부분은 성춘향의 고생하는 장면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 뒤에는 즉시 막이 내려진다. 행복의 묘사는 작가들에 있어서도 그만큼 어색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외과 수술실, 감옥, 고문실, 전쟁터, 법정 등 온갖 불행이 깃든 음산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이다. 우리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억제되고 있는 넘어짐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억제되고 있는 죽음이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첫째로 지식은 탈출구가 아니다. 머리가 발달한 존재일수록 고통에 대한 감각도 더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란 가장 괴로운 사람에 속한다. 자살 역시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자살은 의지의 개체적 현상을 소멸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의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는 예술적 천재들이 추구하는 심미적 해탈인데, 이것 역시 삶의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둘째는 의지의 부정을 통한 윤리적인 해탈의 길인데,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영속적인 해탈로 이끄는 방법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열반(온갖 고통과 번뇌를 초탈하여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상태)의 경지에서 우리들 자신으로서 죽을 것,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고난에 찬 그의 삶에서 형성된 것이라 짐작된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일찍이 망가졌고, 대학교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여자도 사랑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야 했다. 나중에 유명해진 저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 출판 당시에는 누구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비로소 그를 알아주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인 1860년 9월 21일, 그는 냉수욕을 마친 뒤 식탁에 앉은 채, 영영 잠이 들고 말았다. 심장마비였다고 한다. 염세주의 철학자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음미해볼만한 대목이라 하겠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