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국의 석학-이황(2)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제54화)
영암일보입력 : 2025. 06. 13(금) 09:55

▲강성률 철학박사
퇴계 이황의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재혼한 권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권씨가 남편의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가 조금 태우고서는 그 자리에 붉은 천을 대고 기웠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경망스럽다고 하자, 퇴계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허허, 모르는 소리. 붉은 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
이러한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전처 소생의 두 아들에게 시묘살이를 시키는 한편, 자신도 묘 건너편, 즉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1년 넘도록 아내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또한 이때 토계를 퇴계(退溪)라 바꾸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퇴계 이황은 일찍부터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었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했던 데다 어머니와 형의 권고도 있고 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던 것인데, 이에 대해 자기 자신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중에 후회한 바 있다.
48세 되던 해에는 충청도 단양 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 군수로 전임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단양군이 감사(監司, 오늘날의 도지사)가 된 그의 넷째 형 이해(李瀣)의 통솔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49세 되던 해에는 병을 이유로 경상도 감사에게 사직원을 냈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세 번이나 올렸어도 그에 대한 답변이 없자 행장을 꾸려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 해에는 ‘허락 없이 직책을 버렸다’ 하여, 감사로부터 2계급 강등 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부제학, 공조참판(차관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사양하였다. 60세 때에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 동안 독서와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자주 출사(出仕)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 즉 ‘현인을 초대하였는데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라는 뜻의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 그리고 몰래 화공(화가)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며 퇴계를 흠모했다고 한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퇴계에게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는 싫어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으며, 제자 대하기를 마치 벗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비록 어린 제자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른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부형(父兄)의 안부를 물었다. 제자들이 먼 길을 떠날 때에는 술을 대접하여 보냈다. 퇴계는 젊어서 술을 많이 마셨으나 한 번 과음하여 말에서 떨어진 뒤로는 두 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위해 두 가지를 실천했다. 하나는 매일 아침 변소에 앉아 이를 마주치는 일이었다. 아래윗니를 힘껏 부딪쳐서 턱에 힘주기를 적어도 쉰 번 이상씩 반복했다. 이 운동은 이를 튼튼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아래의 항문을 포함한 온몸에 운동 효과를 일으켜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 하나는 투호(投壺)를 하는 것이다. 투호란 일정한 거리를 떼어둔 병에 살을 던져 집어넣는 놀이로서, 퇴계는 이를 통해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첫째는 몸의 균형을 잡는 일. 원래 투호는 몸의 균형을 잡고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만 그 적중률이 높은 법이다. 또 투호란 잡념이 생겨 정신이 산란해지면 결코 명중시킬 수가 없다. 이렇듯 퇴계는 몸의 건강과 정신 집중을 위하여 투호를 생활 속에 도입했고,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먼저 투호를 시켜보았다. 그 솜씨를 보고 건강을 점 쳐보는 한편, 또 학문을 할 수 있는 덕이나 집중력을 가늠해 보았던 것이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이러한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전처 소생의 두 아들에게 시묘살이를 시키는 한편, 자신도 묘 건너편, 즉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1년 넘도록 아내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또한 이때 토계를 퇴계(退溪)라 바꾸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퇴계 이황은 일찍부터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었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했던 데다 어머니와 형의 권고도 있고 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던 것인데, 이에 대해 자기 자신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중에 후회한 바 있다.
48세 되던 해에는 충청도 단양 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 군수로 전임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단양군이 감사(監司, 오늘날의 도지사)가 된 그의 넷째 형 이해(李瀣)의 통솔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49세 되던 해에는 병을 이유로 경상도 감사에게 사직원을 냈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세 번이나 올렸어도 그에 대한 답변이 없자 행장을 꾸려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 해에는 ‘허락 없이 직책을 버렸다’ 하여, 감사로부터 2계급 강등 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부제학, 공조참판(차관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사양하였다. 60세 때에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 동안 독서와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자주 출사(出仕)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 즉 ‘현인을 초대하였는데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라는 뜻의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 그리고 몰래 화공(화가)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며 퇴계를 흠모했다고 한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퇴계에게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는 싫어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으며, 제자 대하기를 마치 벗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비록 어린 제자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른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부형(父兄)의 안부를 물었다. 제자들이 먼 길을 떠날 때에는 술을 대접하여 보냈다. 퇴계는 젊어서 술을 많이 마셨으나 한 번 과음하여 말에서 떨어진 뒤로는 두 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위해 두 가지를 실천했다. 하나는 매일 아침 변소에 앉아 이를 마주치는 일이었다. 아래윗니를 힘껏 부딪쳐서 턱에 힘주기를 적어도 쉰 번 이상씩 반복했다. 이 운동은 이를 튼튼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아래의 항문을 포함한 온몸에 운동 효과를 일으켜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 하나는 투호(投壺)를 하는 것이다. 투호란 일정한 거리를 떼어둔 병에 살을 던져 집어넣는 놀이로서, 퇴계는 이를 통해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첫째는 몸의 균형을 잡는 일. 원래 투호는 몸의 균형을 잡고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만 그 적중률이 높은 법이다. 또 투호란 잡념이 생겨 정신이 산란해지면 결코 명중시킬 수가 없다. 이렇듯 퇴계는 몸의 건강과 정신 집중을 위하여 투호를 생활 속에 도입했고,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먼저 투호를 시켜보았다. 그 솜씨를 보고 건강을 점 쳐보는 한편, 또 학문을 할 수 있는 덕이나 집중력을 가늠해 보았던 것이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