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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석학의 죽음-이황(4)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56화
영암일보입력 : 2025. 07. 11(금)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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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철학박사
퇴계 이황의 말년 관직 생활은 그야말로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되었다. 52세부터 70세까지 18년 동안 50회의 사퇴서를 냈고, 특히 정3품 이상의 벼슬은 실제로 받아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에 중앙의 고관 벼슬을 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한다.

퇴계는 선조에게「무진육조소(戊辰六條梳)」를 올린 적이 있다. 여기에는 ‘소인배의 참소를 막을 것’, ‘제왕의 학문을 두텁게 할 것’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선조는 이 글을 천고(千古)의 격언으로 간주하여,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퇴계는「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는 68세의 노학자 퇴계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군왕(君王)으로서 알아야 할 학문의 핵심 내용을 10개의 그림으로 정리하여 올린 것이다. 여기에는 ‘우주의 아들’로서의 인간의 위상, 물욕(物慾)에 빠져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는 데 대한 반성 등이 적혀 있다.

퇴계는 홍문관대제학과 예문관대제학을 합친 관직에 제수받은 적이 있다.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흠이 없는 석학만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서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한 평생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나이도 70에 가까워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가 한강 뚝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적에 수백 명의 후배, 제자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이별했다고 한다.

그 후로 퇴계는 다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1570년, 70세) 11월 9일, 종갓집 제사에 참석했다가 감기가 악화하여 자리에 누웠다. 12월 3일에는 제자를 시켜 남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보내고, 4일에는 형의 아들 영에게 유서를 받아 적게 하였다. 5일에는 관을 짜라 명하였고, 8일 아침에는 평소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 5시경에 부축을 받아 일어나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퇴계는 임종 자리에서 “나라에서 하사하는 예장(禮葬)은 사양할 것이며, 자그마한 돌에 그저 이름만 쓰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그가 ‘처사이공지구(處士李公之柩)’라고만 쓰라 했다는 말도 있다. 여기에서 처사(處士)란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가리킨다. 거사(居士)가 집에 있으면서 불교에 귀의한 남자를 일컫는다면, 처사란 유교의 교양을 갖춘 선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지리산 밑에 사는 남명 조식(曺植)이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할 벼슬을 다하고 나서 처사라니... 진짜 처사는 나지.”

물론 이 말도 새겨볼 만 하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퇴계의 참뜻이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막상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 동안 정사(政事)를 밀쳐둔 채 그를 애도하였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례식은 영의정의 예(禮)에 준하여 치렀으되, 산소에는 퇴계 자신의 유언대로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웠다.

그 뒤 그를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에 이르렀으며, 도산서원은 크게 보수·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儒林)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조호익(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움)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주자가 세상을 떠난 후, 도(道)의 정통 맥은 이미 중국에서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퇴계는 한 결 같이 성인(聖人)의 학문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퇴계는 실로 주자 이후의 제1인자이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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