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감옥에 갇힌 혁명 사상가-마르크스(1)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62화
영암일보입력 : 2025. 10. 02(목) 09:45

▲강성률 철학박사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힌 마르크스는 부릅뜬 눈에 조금은 겁먹은 듯 하기도 하고 순박해 보이기도 하는 흉상 아래 묘비에서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 마르크스만큼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온 인물도 없을 것이다. 급진적 혁명가에서 공산주의의 창시자, 급기야는 사라지는 몽상가에 이르기까지.
멋있는 수염을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와 인간성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카락, 털로 뒤덮인 손, 단추가 잘못 채워진 웃옷 등 그의 외모와 행동은 아주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존경할 만한 남자의 풍모를 가졌다. 그의 행동은 부드러우면서도 과감하였으며 또 자신에 차 있었다. 그의 태도는 모든 예절과 너무나 상반된 것이어서 거만하게 보였고, 때로는 약간의 경멸감마저 띠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의 명령조로만 말했다........ 내 앞에는 한 민주주의 독재자의 화신이 서 있었다.”
마르크스(1818년~1883년)는 독일 라인 지방 트리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계몽주의에 심취한 당시 독일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개종한 뒤 법률가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마르크스 역시 대학생이 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Bonn)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법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헤겔의 사상이 절대적인 권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세세한 당부의 편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아들아. 청소를 사소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건강과 쾌적함은 바로 그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방 청소하는 것을 잊지 말고 잘 지켜라. 그리고 매주 수세미와 비누로 문질러 닦도록 해라.”
사실 그녀가 이러한 편지를 쓴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마르크스의 생활 자체가 정리 정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리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결투하다가 부상을 입는가 하면 고성방가 및 음주로 학생감옥소에 들어가기도 했다.(당시 독일 대학은 치외법권 지역이었기 때문에 대학 자체 안에 감옥을 두어 ‘사고를 친’ 학생들을 가두었다. 길어야 2~3주인 데다 규칙도 그리 엄하지 않았다. 수업을 들으러 나갈 수 있었고, 밖에서 사식을 들여와 먹거나 친구들과도 따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금지된 무기를 소유하였다 하여 고소당하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로 빚을 지기까지 한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학업을 계속하였지만, 여기에서의 생활 역시 아버지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등잔 아래서 모호한 야심을 품고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짓을 하는 놈,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제멋대로 된 녀석” 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스물세 살에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교수가 되려고 하였지만, 대부분의 헤겔 좌파들처럼 그 역시 보수주의적인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교수직 진출을 포기한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진보적인 논설을 싣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정치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대담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신문을 편집한다. 그 후 마르크스는 오래 기다려온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서둘러 결혼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멋있는 수염을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와 인간성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카락, 털로 뒤덮인 손, 단추가 잘못 채워진 웃옷 등 그의 외모와 행동은 아주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존경할 만한 남자의 풍모를 가졌다. 그의 행동은 부드러우면서도 과감하였으며 또 자신에 차 있었다. 그의 태도는 모든 예절과 너무나 상반된 것이어서 거만하게 보였고, 때로는 약간의 경멸감마저 띠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의 명령조로만 말했다........ 내 앞에는 한 민주주의 독재자의 화신이 서 있었다.”
마르크스(1818년~1883년)는 독일 라인 지방 트리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계몽주의에 심취한 당시 독일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개종한 뒤 법률가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마르크스 역시 대학생이 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Bonn)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법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헤겔의 사상이 절대적인 권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세세한 당부의 편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아들아. 청소를 사소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건강과 쾌적함은 바로 그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방 청소하는 것을 잊지 말고 잘 지켜라. 그리고 매주 수세미와 비누로 문질러 닦도록 해라.”
사실 그녀가 이러한 편지를 쓴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마르크스의 생활 자체가 정리 정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리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결투하다가 부상을 입는가 하면 고성방가 및 음주로 학생감옥소에 들어가기도 했다.(당시 독일 대학은 치외법권 지역이었기 때문에 대학 자체 안에 감옥을 두어 ‘사고를 친’ 학생들을 가두었다. 길어야 2~3주인 데다 규칙도 그리 엄하지 않았다. 수업을 들으러 나갈 수 있었고, 밖에서 사식을 들여와 먹거나 친구들과도 따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금지된 무기를 소유하였다 하여 고소당하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로 빚을 지기까지 한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학업을 계속하였지만, 여기에서의 생활 역시 아버지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등잔 아래서 모호한 야심을 품고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짓을 하는 놈,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제멋대로 된 녀석” 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스물세 살에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교수가 되려고 하였지만, 대부분의 헤겔 좌파들처럼 그 역시 보수주의적인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교수직 진출을 포기한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진보적인 논설을 싣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정치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대담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신문을 편집한다. 그 후 마르크스는 오래 기다려온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서둘러 결혼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