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속에서 미쳐버린 철학자-니체(2)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66화
영암일보입력 : 2025. 11. 20(목) 17:07

▲강성률 철학박사
니체는 스위스의 바젤 대학에서 풍부한 강의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편두통, 치질, 가슴앓이, 류머티즘, 지독한 근시 같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시달리던 니체는 보불전쟁(1870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지원, 종군했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나빠지고 말았다. 이때 또 약을 잘못 쓴 탓에 극심한 신경쇠약과 위장병으로 평생 병마와 싸우게 되는데, 그는 항상 소화제와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을 무척 사랑한 니체는 바그너(독일의 음악가, 오페라 작곡가)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스물일곱 살에는 6주 만에「비극의 탄생」을 써서 바그너에게 바쳤고, 바그너는 그 책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기독교를 비방한 이 책에 대해 당시의 학계는 큰 반감을 표명하였고, 학생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아 그의 명성은 크게 빛을 바래기에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환멸을 느낀 그는 바그너와 결별을 선언하고 만다. “바그너가 기독교적 예술을 추구하는 데다 그 자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니체로부터 비판을 당한 바그너는 그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고, 이러한 일들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서른다섯 살 때에는 두통과 눈의 통증, 우울 증세, 그리고 대학교수직에 대한 회의감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차라투스트라』1,2,3부를 출판했으나 이 책은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렸을 뿐이고, 그나마 제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했고,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 점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니체는 새로운 책들을 써냈다. 하지만 그의 글에 동조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와의 대결을 통하여 모든 기존 가치의 전도(顚倒)를 위해 오랫동안 벌여온 고독한 투쟁은 그의 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까지 탕진케 하였고, 급기야는 시력마저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마침내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진다. 말을 끌어안으며 횡설수설하는 그를 사람들은 집으로 옮겼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고, 독일의 예나 대학병원으로 옮겨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후로도 그는 악기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배회하였는데, 간혹 “나는 신이다. 다만 변장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와 여동생의 보살핌 속에서 1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혼수상태에서 헤맨 니체는 끝내 1900년에 심장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친구 몇 사람이 고별사를 낭독하였다.
실존철학의 선구자 니체(1844년~1900년)는 “천박하고 병들고 약한 자만을 위하는 기독교 도덕은 노예도덕으로서 마땅히 없어져야 하며, 이제부터는 고귀하고 건강하고 힘센 자들을 위한 군주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 기준이었던 ‘신’에 대해 그 죽음을 선고하고(“신은 죽었다!”), 머지않아 허무주의(니힐리즘)가 다가올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를 ‘동일한 것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으로 붙잡아 선악(善惡)을 초월한 입장 즉, 선악의 피안(善惡의 彼岸)에서 도리어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고 나섰다. 여기에서 바로 “이것이 바로 인생이었던가? 그래. 그렇고말고.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고 하는 유명한 생(삶)의 긍정이 나온다. 한편, 모든 삶의 근저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나타낸 존재로 초인(超人)을 내세웠는데, 하지만 그의 철학은 엉뚱하게 히틀러 추종자들에 의해 나치즘의 사상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음악을 무척 사랑한 니체는 바그너(독일의 음악가, 오페라 작곡가)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스물일곱 살에는 6주 만에「비극의 탄생」을 써서 바그너에게 바쳤고, 바그너는 그 책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기독교를 비방한 이 책에 대해 당시의 학계는 큰 반감을 표명하였고, 학생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아 그의 명성은 크게 빛을 바래기에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환멸을 느낀 그는 바그너와 결별을 선언하고 만다. “바그너가 기독교적 예술을 추구하는 데다 그 자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니체로부터 비판을 당한 바그너는 그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고, 이러한 일들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서른다섯 살 때에는 두통과 눈의 통증, 우울 증세, 그리고 대학교수직에 대한 회의감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차라투스트라』1,2,3부를 출판했으나 이 책은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렸을 뿐이고, 그나마 제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했고,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 점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니체는 새로운 책들을 써냈다. 하지만 그의 글에 동조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와의 대결을 통하여 모든 기존 가치의 전도(顚倒)를 위해 오랫동안 벌여온 고독한 투쟁은 그의 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까지 탕진케 하였고, 급기야는 시력마저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마침내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진다. 말을 끌어안으며 횡설수설하는 그를 사람들은 집으로 옮겼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고, 독일의 예나 대학병원으로 옮겨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후로도 그는 악기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배회하였는데, 간혹 “나는 신이다. 다만 변장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와 여동생의 보살핌 속에서 1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혼수상태에서 헤맨 니체는 끝내 1900년에 심장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친구 몇 사람이 고별사를 낭독하였다.
실존철학의 선구자 니체(1844년~1900년)는 “천박하고 병들고 약한 자만을 위하는 기독교 도덕은 노예도덕으로서 마땅히 없어져야 하며, 이제부터는 고귀하고 건강하고 힘센 자들을 위한 군주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 기준이었던 ‘신’에 대해 그 죽음을 선고하고(“신은 죽었다!”), 머지않아 허무주의(니힐리즘)가 다가올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를 ‘동일한 것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으로 붙잡아 선악(善惡)을 초월한 입장 즉, 선악의 피안(善惡의 彼岸)에서 도리어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고 나섰다. 여기에서 바로 “이것이 바로 인생이었던가? 그래. 그렇고말고.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고 하는 유명한 생(삶)의 긍정이 나온다. 한편, 모든 삶의 근저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나타낸 존재로 초인(超人)을 내세웠는데, 하지만 그의 철학은 엉뚱하게 히틀러 추종자들에 의해 나치즘의 사상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