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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하고도 이상한 용어들-프로이트(2)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68화
영암일보입력 : 2025. 12. 19(금)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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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철학박사
프로이트는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가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 아이들에게 붙였다. 하지만 많은 자녀들 가운데 오로지 딸 안나만이 독신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런던 정신분석학계의 거장이 되었다. 마흔 살 무렵부터는 처제가 한 식구로서 죽을 때까지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와 처제와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풍문이 있었지만, 그의 방대한 전기를 쓴 존스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1886년 3월 프랑스 파리 유학을 마치고 오스트리아의 비인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의학학회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비인의 의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격렬히 반대하였고, 그에게 환자 진찰조차 승낙하지 않았다. 뇌 해부학의 연구실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강의 시간도 취소되었다. 의학계에서 고립된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환자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에 매달려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출판된『꿈의 해석』역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초판의 600부가 모두 팔리는 데에 무려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무의식의 세계’를 열어 보인 뛰어난 저서로 평가되고 있다.

1908년 12월 프로이트는 미국 클라크대학교 창립 20주년 기념식장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 일은 그의 학설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장래는 당신의 연구에 달려 있소.”라고 프로이트를 격려하였다.

노년의 프로이트는 턱에 암이 생겨 서른 세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을 만큼 지독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더욱이 이무렵 사랑하는 손자가 죽자 그는 목을 놓아 울었다. 그가 눈물을 흘린 사실이 알려진 것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이때뿐이라고 한다. 턱 수술을 받은 뒤에도 그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그의 정신분석학을 불법화시키고, 이와 관련된 모든 서적을 불태워버렸으며 프로이트의 재산까지 몰수하고 말았다. 나치의 박해를 견디지 못해 그는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으며, 83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그가 살아생전에 좋아했던 희랍의 항아리에 담겨져 그 곳에 묻혔다.

프로이트(1856년~1939년)는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그리고 그의 최대 업적은 바로 무의식의 발견에 있다. 무의식이란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꿈이나 정신분석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의식화하지 않는 의식’을 말한다. 행위의 당사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 무의식은 인간의 성(性) 충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 문화와 그 소산물은 억제되고 순화된 리비도(Libido, 일종의 성 충동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산물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예술, 종교 등의 문화를 해명하려고도 하였다.

이드(Id-쾌락의 원리에 지배됨)와 자아(밖의 현실을 고려함), 초자아(이드를 제압하는 보다 높은 자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죽음의 본능, 퇴행(먼저의 상태 또는 시기로 돌아가는 것), 승화(성적 에너지가 보다 가치 있는 분야로 바뀌는 현상), 억압(불쾌한 기억들을 일부러 내쫓는 심리적 현상), 투사(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거나 그 역방향의 현상), 전이(하나의 학습이 다른 학습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 등의 생소한 용어들이 그에 의하여 일상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사상이 독창적이기는 하나 명쾌한 맛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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