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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의 燈(등)-포효하는 정치, 깨어있는 유권자
영암일보입력 : 2026. 01. 09(금)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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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호 영암일보 대표이사/법학박사
조는 듯 앉은 매와 병든 듯 걷는 호랑이 이야기다.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응립여수(應立如睦), 호행사병(虎行愼病)''은 겉모습과 본질의 간극을 일깨운다. 매는 졸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시선은 먹잇감을 꿰뚫고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지만 온 신경은 사냥의 순간을 향해 곤두서 있다. 힘을 빼고 있는 것이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또렷이 깨어있는 상태다.
만약 매가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가 근육을 잔뜩 부풀린 채 어슬렁거린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노루와 사슴 같은 약자들은 그 미세한 기척을 놓치지 않는다.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바람처럼 사라진다. '노루는 자기가 뀐 방귀 소리에 놀라 십 리를 도망간다’는 말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합리적인 태도다. 과잉 반응은 약점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다.
그래서 진짜 호랑이는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병든 듯 힘을 빼고, 관심 없는 척하며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날 선 발톱과 이빨은 숨기고 상대가 방심하는 단 한 순간을 기다린다. 천하의 호랑이다워 보이지 않아야 비로소 천하의 호랑이로 살아남는다는 역설이다. 진짜 강자는 언제 힘을 빼야 하는지,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를 안다.
문제는 요즘 숲속에 이런 호랑이보다 '노루 같은 호랑이’가 더 많다는 점이다. 제왕인 양 포효하고, 존재를 과시하며, 늘 앞에 서서 힘을 주고 다닌다. 말은 많고 동작은 요란하지만, 정작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사냥감은 이미 달아났고, 경쟁자는 등을 돌린 뒤다. 남는 것은 공허한 울림과 더 큰 허기뿐이다. 실제로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이 10% 남짓이라는 사실은, 무작정 달려드는 방식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장면은 오늘의 정치 풍경과도 겹쳐 보인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치권의 포효는 커진다. 개혁을 외치고, 결단을 말하며, 상대를 향한 공격은 날카롭다. 그러나 정작 정책의 깊이, 준비의 흔적, 책임의 무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보여 주기 식 언행과 과잉 제스처가 난무할수록 정치에 대한 피로감은 커지고, 신뢰는 닳아간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조용해졌다. 대신 더 날카로워졌다. 이제는 "누가 더 떠드는가”가 아니라 "누가 준비돼 있는가”를 본다. "누가 공격적인가”가아니라 "누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포효하는 후보보다 기록이 남은 인물을 찾고, 말이 많은 정치인보다 결과로 증명한 행정을 신뢰한다.
지금 유권자의 정서는 분명하다. 근거 없는 비방이나 뒷말에 현혹되지 않고, 정당하지 않으며 설득력 없는 주장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화려한 구호보다 조용한 실천을 보고, 약속보다 결과를 따진다. 유권자들은 이미 '깨어 있는 유권자'가 되었다. 작은 기척에도 민감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반대로 깊은 숲속에서 묵묵히 길을 닦고, 불필요한 말과 제스처를 삼키며 자기 몫을 해내는 이들도 있다. 드러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행정은 성과로, 정치는 책임으로 증명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이다. 포효는 사라지고 실행은 남는다. 말은 휘발되지만 결과는 기록된다.
힘을 뺄 줄 아는 사람과 늘 힘주고 다니는 사람의 차이는 결국 시간이 증명한다. 진짜 실력은 요란함이 아니라 절제에서 드러나고, 진짜 강자는 앞서 달리기보다 때를 기다릴 줄 안다. 화내지 않는다고 얕잡아보지 말고, 조용하다고 가벼이 보지 말라는 채근담의 가르침은 그래서 지금 더욱 절실하다.
진정으로 호랑이가 되고 싶은가. 진정으로 노루로 남고 싶지 않다면, 먼저 스스로를 비우고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을 대하듯 타인을 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유권자를 존중하라. 신뢰와 책임으로 자신을 채울 때 유권자는 그 자리에 함께 설 것이다. 포효의 정치는 사라져도 깨어있는 정치는 남는다. 그리고 오직 깨어있는 정치만이 깨어있는 유권자 앞에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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