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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 대한 사랑- 야스퍼스(2)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74화
영암일보입력 : 2026. 03. 20(금)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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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철학박사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유태인 아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야스퍼스에게는 상당한 박해가 가해졌다. 철학과 주임교수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행정에 관한 모든 권한이 박탈되었고, 1937년 여름 학기가 끝나기 직전에 대학으로부터 휴직을 통보받는다. 여기에서 야스퍼스는'외국으로 망명을 하든지, 아니면 국내에서 강제 이혼을 당하든지'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는데, 이혼을 하지 않은 채 국내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생활. 그는 의사 친구로부터 청산가리를 얻어 낮에는 선반에, 저녁에는 머리맡에 두었다. 비밀경찰이 언제 침입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언장도 미리 작성해두었다. 이때 그의 부인은 남편을 위해 자살하려고까지 맘먹었다. 마침내 생활물자의 배급이 중단되고 집도 빼앗긴 채 생명마저 위협을 받게 되자, 야스퍼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을 갖고『철학적 논리학』과『철학사』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나중에 이때를 회고하여,“나는 히틀러로부터 8년 동안의 휴가를 얻었다. 이 휴가가 없었던들, 나의 철학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1945년 5월 7일, 나치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희망에 부푼 야스퍼스는 13 명의 교수로 위원회를 만들어 대학 재건에 착수하였다. 패전의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야스퍼스의 존재는 그 자체가 커다란 위안이었다. 세상은 그를 영웅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그리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방문객에 대하여 마치 나라님이 백성을 대하듯 하였다. 나아가 손님에게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해 가르치려고만 들었다. 이러한 모습은 일생동안 그를 지배해온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항상 외로워했고,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하고만 교제를 가졌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와도 자주 헤어지곤 하였다. 이러한 고독은 물론 어려서부터 그를 따라다녔던 병에도 원인이 있었다. 이 병 때문에 그는 여행이나 승마, 춤, 수영 등을 즐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타고난 그의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야스퍼스는 스위스의 바젤에 살고 있었던 2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영화구경을 했고, 단 한 번 연극을 보러 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제자들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뢰를 나타내기 위한 몸짓에 불과했다.

야스퍼스는 교수직 외에 어떠한 공직도 맡은 적이 없으며, 대학에서의 보직마저 거절하였다. 그는 한 번도 동료들과 친밀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좌익과 우익 모두로부터 경멸에 찬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청소년을 유혹하는 자’라거나 ‘연극을 부리고 있다.’라 하면서 비난하였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그의 철학을 두고 ‘주정꾼의 허튼 소리’라고까지 말했다. 야스퍼스가 스위스 시민권을 갖게 된 것은 1967년 6월 말이며,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86세를 일기로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신병리학자인 야스퍼스(1883년~1969년)는 과학의 한계를 자각하고 실존철학을 연구했다. 그에 의하면, 실존(나)은 다른 실존과의 상호 교제를 통하여 비로소 참된 자기를 발견한다. 나를 둘러싼 한계 상황(나의 출생지와 부모, 죽음, 고뇌, 싸움, 죄 등)은 나로 하여금 실존의 유한성을 깊이 깨닫게 만들며, 그러한 좌절로부터 초월자(신적 존재)에로 향한 비약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야스퍼스는 과학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고, 무엇보다 인간 상호간의 결합을 강조하였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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