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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나뒹군 철학자’-하이데거(1)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75화
영암일보입력 : 2026. 04. 03(금)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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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철학박사
언젠가 비엔나(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한 철학자가 하이데거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는 강연을 끝내고 나서 맨 앞줄에 앉아 있는 한 농부가 강연이 계속되는 동안 줄곧 다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는 점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강연이 매우 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농부는 바로 하이데거 본인이었다. 외모로만 보았을 때, 그는 영락없이 농부였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1889년 독일 남부의 메스키르히에서 성당지기인 아버지와 농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잘했으나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안 메스키리히 성당의 신부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때의 조건은 졸업 후 신부가 되는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하고 만다. 대신 스물두 살의 나이 때,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철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젊은 시절 스키에 열광하였고, 또 실제로 선수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플라톤에 대한 세미나를 마친 뒤, 일행은 하이데거와 함께 곧 스키장으로 향했다. 이때 시범을 보이던 하이데거가 커브 길에 미끄러져 눈 속에 나뒹굴고 말았다. 이러한 실수에 사람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즉시 일어나, 그야말로 기막힌 회전기술을 보여줌으로써 그 같은 실수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스키 선생으로서보다는 철학교수로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의 강의나 강연 때에 강의실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그는 흥분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또 불필요한 잡소리도 없이 직설적으로 강의를 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말에서는 어떤 강력하고도 매혹적인 힘이 발산되었던 바, 학생들은 그로부터 매우 차분하고도 긴장된 사유의 방법을 배웠다.

하이데거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강사로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어 후설(현상학의 거장)의 후계자로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런 그가 1929년에 발표한『존재와 시간』으로 더욱 유명해지고 말았다. 기존의 철학에 대해 번개같이 강력한 철퇴를 가한 그 책을 통하여 하이데거는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향해 돌파구를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3년에는 마흔 네 살의 나이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에 추대되었다. 비록 10개월 만에 총장직을 사임하고 다시 평교수로 돌아오긴 했으나, 나치 정권 치하에서의 총장 취임은 그의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 지울 수 없는 티로 남게 된다. 짧은 기간이나마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그는 나치가 패망한 1945년에 교수직을 내놓아야 했다. 1951년에 복직되긴 했으나 다음 해에 명예교수로 물러났다. 그 후로 하이데거는 현실적인 정치와 담을 쌓고 강연과 저술에만 몰두한다. 만년에 가서는 모든 공직생활에서 완전히 물러나, 아주 가까운 동료들의 모임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하이데거는 한적한 산 속 비탈진 언덕 위에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갖고 있었다. 간단한 나무 의자와 침대로 검소하게 꾸며진 오두막이었다. 물은 부근에 있는 우물에서 직접 길어와야 했다. 그는 움막 앞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과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곤 하였다. 크지 않은 체구에 향토풍의 옷, 끝이 뾰족한 모자를 눌러쓴 채 풀밭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바로 그가 베를린대학의 명예교수 초빙을 두 번이나 거절한 대철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으리라. 하이데거는 대도시의 소음과 요란한 문화보다는 들길을 거닐면서 자연이 건네주는 언어의 의미를 기록하고 싶어 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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